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문단 편집) === [[서부전선]] === || [[파일:external/img.timeinc.net/1101420831_400.jpg|width=100%]] || [[파일:external/2.bp.blogspot.com/Bundesarchiv_Bild_101I-718-0149-18A%252C_Paris%252C_Gerd_v._Rundstedt%252C_Erwin_Rommel.jpg|width=100%]] || {{{-1 ▲(좌)[[1942년]] [[8월 31일]] [[타임(주간지)|타임]]지 표지로 선정된 룬트슈테트. (우)[[에르빈 롬멜]]와 함께.}}} 룬트슈테트는 달리 히틀러로부터 다시 부름을 받아 서부전선 총사령관(OB WEST)을 맡아 프랑스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좋은 부대를 많이 양성하였으나, 만드는 족족 동부전선에 빼앗겼다. 결국 그는 껍데기만 남은 부대로 [[대서양]]을 수비하게 되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대서양 방벽]]"을 신나게 선전했으나 실제로 대서양에서 증원은 아무 것도 없었고 동부전선의 무게추가 소련 쪽으로 기운 1943년 11월이 되어서야 [[에르빈 롬멜]]이 부임해 오면서 증원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롬멜과 룬트슈테트는 기갑 부대의 배치 지점에 대해 이견을 보였다. 즉 롬멜은 기갑부대를 노르망디 해안 가까이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룬트슈테트는 노르망디 보다는 도버 해협을 주목했고 그렇기 때문에 더 서쪽(칼레 방면)에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둘은 기갑 부대를 나눠 배치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룬트슈테트는 노르망디에 적이 상륙하더라도 기갑부대가 신속히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제공권을 연합국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1944년 6월, 연합국이 상륙하자마자 노르망디에 분산 배치된 독일 기갑 부대는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그러나 이는 룬트슈테트와 롬멜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탓이 컸을 뿐이다. 롬멜은 디에프 때와 같이 교두보가 형성되기 전에 신속하게 제압하는 것을 중시한 반면, 룬트슈테트는 영미 연합군의 [[공수부대]] 전력의 후방 교란과 해/공군 전력의 화력(실제로, 살레르노 만 상륙 작전 등에서 연합군의 상륙 작전을 저지하려다 [[함포]] 지원에 의해 좌절당한 사례가 있다)을 두려워한 것으로, 연합군의 화력에 귀중한 기갑 전력이 헛되이 소진되는 것을 막고 아울러 후방 교란을 막아야 반격을 효과적으로 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어느 쪽 의견이든 일장일단이 있었다. 히틀러는 어느 한쪽의 의견을 확실하게 손들어 주지 못해 귀중한 기갑 전력을 어정쩡하게 갈라서 주기로 한 타협책을 제시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우유부단한 결정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두 견해의 단점만 극대화되버렸다.] 거기다가 룬트슈테트는 히틀러에게 영미 연합군과 정전을 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는데, 이는 히틀러를 격분시켜서 룬트슈테트는 파면되었다. 후임으로 [[귄터 폰 클루게]]가 서부전선 총사령관에 올랐다. 그러나 8월 클루게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아 베를린으로 소환 명령을 받았고, 클루게는 소환 중 음독 자살했다. 이뿐만 아니라 롬멜도 혐의를 받아 히틀러의 자살 명령을 받고 자살했다. 그래서 [[발터 모델]]이 클루게의 후임으로 서부전선 총사령관과 B집단군 사령관을 겸직하였고 프랑스 영토에 주둔 중인 독일군이 서부 방벽으로 차례차례 철수한 9월 4일 무렵에 룬트슈테트가 서부전선 총사령관에 재차 임명되었다. 독일군은 연합국의 공세 때문에 프랑스에서 후퇴하여, 1944년 12월의 전선은 1940년 봄의 프랑스 침공 때와 비슷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에 영감을 받아 [[아르덴 대공세]]를 계획했다. 룬트슈테트는 제공권의 부재를 들어 이를 반대했으나, 역시 히틀러의 결심은 말릴 수 없었고, 결국 명령에 따라 실행할 수밖에 없었다. 1944년과 1940년의 다른 점은 독일군에는 제공권이 없었고, 또 하나는 4년간 버전업된 독일군의 [[티거]]와 [[판터]] 탱크는 1940년 주력인 [[2호 전차]]보다 훨씬 무거웠기 때문에 아르덴 숲을 통과하기 힘들었다. 결국 공세는 철저히 실패했고 더구나 이 공세는 소련군에 맞서던 동부 병력을 빼돌려서 했기 때문에 소련군은 이제 독일 본토까지 유린하면서 [[베를린]]으로 다가왔다. 룬트슈테트는 [[빌헬름 카이텔]]에게 히틀러에게 정전을 수용하도록 설득해 달라는 부탁을 하지만,[* 그런데 당시 통화 내용을 볼 때, 룬트슈테트의 발언은 '부탁' 수준이 아니라 '[[갈굼]]'이었다. 당시 독일 장군들 시각에 카이텔은 '무능한 간신배'였으므로, '최고참' 입장의 룬트슈테트가 시원하게 갈궈 버린 것. 물론 이에 대한 간신배의 대응은 당연히 '고자질'. 1951년작 전쟁 영화 <사막의 여우 롬멜(The Desert Fox : The Story of Rommel)>에서는 롬멜이 보는 앞에서 룬트슈테트가 전화로 카이텔을 갈구는 장면으로 묘사된다.] 아첨꾼 카이텔은 이를 히틀러에게 일러바쳤고, 격분한 히틀러는 1945년 3월에 다시 룬트슈테트를 파면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